순교증언 및 기록 5 페이지 | 예수사랑
  •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롬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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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증언 및 기록

본문

- 김대건(안드레아) 신부
* 나이 : 25세 / 순교 년 월일 : 1846.09.16
* 순교장소 : 새남터 / 형벌 : 군문효수

성 안드레아 김대건(金大建)은 1821년 8월 21일 충청도 솔뫼에서 김제준 이냐시오와 고 우르술라의 아들로 태어나 순교자인 증조부와 부친의 영성을 배우며 자라났다.
1836년 16세 때에 최방제 프란치스꼬와 최양업 토마와 함께 신학생으로 선발되어, 그 이듬해 마카오에서 사제가 되기 위한 공부를 시작하였다. 1844년 부제품을 받았으며, 1845년 8월 17일 상해 부근 긴가함(金家巷)이라는 교우촌의 성당에서 페레올 주교로부터 한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사제 서품을 받았다.
이후 페레올 주교와 다블뤼 신부를 모시고 귀국한 후 국내 선교활동에 힘쓰는 한편 외국 신부들의 입국을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였다. 그러던 중 1846년 6월 5일 백령도에서 중국 어선과 연락을 취하고 돌아오는 길에 체포되었다.
해주 감영과 서울에서 4차의 문초와 40차례의 신문을 받는 동안 김 신부의 탁월한 지식과 외국어 실력에 탄복한 일부 대신들은 배교시켜 인재로 등용하려고 했지만 오히려 이를 거절하고 관리들에게 복음을 전파하자 끝내 사형을 선고하였다.
김 신부는 사제생활 1년 1개월만에 군문효수의 형을 받고 장렬하게 순교하였지만 하느님에 대한 믿음과 사랑의 정신을 만인들에게 일깨워 주고자 했다.

- 정하상(바울로)
* 나이 : 44세 / 순교 년 월일 : 1839.09.22
* 순교장소 : 서소문밖 / 형벌 : 참수

성 바울로 정하상(丁夏祥)은 순교자인 정약종 아우구스띠노와 유세실리아의 아들로 어려서부터 기도와 교리를 배워 깊은 신앙을 가졌으며, 한국천주교회 초기 평신도 지도자였다.
신유박해 때 부친과 친형 철상(哲祥)이 순교하자 나이 7세인 정하상은 누이동생 정혜와 어머니를 모시고 마재(馬재:경기도 양주군)의 큰 댁으로 내려왔다. 20세 때 단신 상경하여 조증이 바르바라 집에 머물면서 교회를 위해 헌신하기로 결심하였고, 교리와 학문을 철저하게 익히기 위하여 함경도에 귀양 중에 있던 조동섬 유스티노에게 찾아가 수년간 학덕을 연마하기도 했다.
1801년 신유박해 이후, 흩어진 신자들을 찾아 신앙의 열기를 북돋우면서 성직자 영입을 위해 북경까지 9회, 변문까지 3회나 왕래하였다. 1823년부터는 국내 교회의 실질적인 지도자의 일을 보면서, 성직자 파견을 요청하는 청원서를 북경 주교를 통하여 교황청에 보내는 열의를 보여주었다. 이러한 사실은 조선교구 설정에 직접적인 계기가 되어, 1831년 9월9일 자로 교황 그레고리오 16세에 의해 조선교구가 설정되었다.
성직자 영입에 지속적인 노력으로 유방제 신부와 샤스탕 신부를 비밀리에 모셨고, 1837년에는 조선교구 제2대 교구장인 앵베르 주교를 모셨다. 앵베르 주교는 학식과 덕망이 있는 정하상에게 신품성사를 베풀어 한국의 최초 성직자가 되기를 기대하였으나, 그 꿈을 이루기 전에 순교의 영광을 얻었다.
1839년 9월 22일 서소문 밖에서 참수로 순교하였는데, 온갖 고통을 강인하게 참아 나간 모범을 보여 평신도 지도자로서의 면모를 여유있게 나타내었다. 자신의 믿음을 순교로써 실증했었다.
정하상의 상재상서(上宰相書)는 한국 최초의 호교론서(護敎論書)이며, 천주교의 교리를 설명하면서 박해를 중단시켜야 할 이유와 주장을 밝힌 훌륭한 내용을 담고 있다.
피를 쏟는 형벌에도 태연자약하였고, 사형선고를 받고 형장으로 가면서도 얼굴에 기쁜 표정을 지녔다고 하니 신앙을 생활화한 산 표본이라 하겠다.

- 이윤일(요한)
* 나이 : 43세 / 순교 년 월일 : 1867.01.21
* 순교장소 : 관덕정(대구) / 형벌 : 교수

성 요한 이윤일(李尹一)은 일명 제헌으로 충청도 홍주에서 열심한 교우 집안에서 태어나, 경상도 문경의 여호목골에 살며 회장으로 활동하였다.
1866년 병인박해의 여파가 경상도 지역에까지 미치게 되어, 그해 11월 가족들과 마을 교우 30여 명과 함께 체포되었다.
문경관아에서 3일동안 혹형과 고문을 당한 후, 배교하지 않은 교우들과 함께 상주로 이송되었다. 상주에서 한달에 세 번씩 석달동안 9차례의 혹형과 고문을 당하면서도 끝까지 신앙을 지키다가, 다시 김회장 형제와 함께 사학의 두목으로 지목되어 대구 감영으로 이송되었다. 1867년 1월 21일 대구 남문 밖 관덕정으로 끌려나갔고, 집행관이 선고문을 낭독하자 요한은 희광이에게 돈을 꺼내주며 "나를 위해 수고하는 자네에게 줄터이니 받아서 요긴하게 쓰게나. 그 대신 부디 한 칼에 내 목을 베어주게나"하였다. 참수형으로 순교하여 천국의 영원한 가족이 되었다.

- 이호영(베드로)
* 나이 : 35세 / 순교 년 월일 : 1838.11.25
* 순교장소 : 형조전옥 / 형벌 : 옥사

성 베드로 이호영은 경기도 이천에서 태어난 후 어려서 입교하였는데, 부친이 대세를 받고 사망하자 모친과 누이 이소사(아가타)와 함께 서울로 이주하여 신앙생활에 열성을 다 하였다. 중국인 유방제(劉方濟) 신부에 의해 회장으로 임명되어 교회의 여러가지 일들을 성실하게 처리하였다.
1835년 2월에 한강변 무쇠막에서 누이 이 아가타와 함께 체포되어 옥고를 당하면서 갖은 형벌을 받았다. 감옥 안에서의 고통은 말로 형용하기 어려웠다. 여러차례 혹형을 당하여 온몸이 상처 투성이고 살이 터져 피와 고름이 흐르며 몸을 움직일 수 조차 없을 정도 였는데 그 후로도 형조로 이송되어 3차의 형문을 당하고 사형선고를 받았다. 이 감옥에는 악취는 물론 굶주림에 지친 이는 더러운 지푸라기를 뜯어 먹기도 하고 이까지 잡아먹었다고 한다. 성인은 포청과 형조에서 매우 고통스러운 고문을 당했지만 비명 한마디 없이 참아 내어 인내의 모범을 보여 주었다. 형조에서 내린 사형선고의 글귀중에 사학죄인(邪學罪人)이라는 문구를 보고, 천주교는 사학이 아니라 거룩하고 참된 종교라고 주장하면서 수결(手決)을 거부하였다. 형리는 억지로 손을 끌어다가 찍게 하였다.
4년간 감옥에 있으면서 온화한 모습을 항상 보여주면서 기도를 계속하였고, 누이와 함께 순교하기를 원하였지만, 옥에서 얻은 병으로 끝내 1838년 11월 25일 주님의 나라로 갔다.

- 정국보(쁘로따시오)
* 나이 : 40세 / 순교 년 월일 : 1839.05.20
* 순교장소 : 포청옥 / 형벌 : 장사

성 쁘로다시오 정국보는 개성의 명문 양반 집안에서 태어났다. 할아버지가 직무상 과실로 벌을 받자 아버지와 함께 서울로 올라와 신분을 감추고 새끼꼬는 일을 하면서 미천하게 살았다. 30세 경에 입교하여 중국인 유방제 신부에게 영세한 후 부인과 함께 홍살문 근처에 살면서 성사를 보기 위해 서울로 모여드는 교우들을 돌보았다.
가난과 병고로 14자녀를 모두 잃으면서도 남을 위해 봉사하며 독실한 신앙생활의 모범을 보였다.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타인의 밀고로 부인과 함께 체포되어, 포도청에서 배교를 강요하는 혹독한 고문을 받았으나 조금도 굴하지 않았었다. 그러나 형조로 이송되어 형벌과 형관의 감언이설로 결국 배교하여 석방되었다. 그러나 석방되어 집에 돌아오자마자 배교를 위우치면서 다시 형조에 달려가 배교한 것을 취소하고 죽기를 원하였다.
여러차례 형조로 찾아가 자신이 교우임을 떳떳이 밝혔으나 형조의 문지기는 이를 거절하며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에 굽히지 않고 있다가 형조판서가 다니는 길목을 지키고 있다가 형조판서에게 직접 교우임을 밝히면서 다시 5월 12일에 체포되었다.
처음 그의 배교는 신자들을 슬프게 만들었고 격분시켰지만, 그의 회개와 순교는 더 큰 기쁨이 되었다. 정 쁠로따시오는 자기가 처음 배교하였던 그곳에서 곤장 25대를 맞아 41세로 순교하였는데 그날이 1839년 5월 21일이었다.

- 김아기(아가다)
* 나이 : 52세 / 순교 년 월일 : 1839.05.24
* 순교장소 : 서소문밖 / 형벌 : 참수

성녀 아가다 김아기(金阿 )는 비신자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는 미신을 지키는 외교인과 결혼하여 신앙을 모르고 살아오던 중, 친정 언니의 열심한 권면으로 미신을 떨치고 교리를 받게 되었다. 기억력이 나빠 12단(十二端) 기도문도 외지 못했지만 믿음의 정신이 지극하여, 어떻게 하든지 주님의 자녀가 되겠다는 자세로 열심히 살았다.
그런던 중 1836년 10월 김업이, 한아기 등과 함께 천주교 서적을 감춘 죄로 체포되어 고문을 받았다. 포장이 천주교 믿는다는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 물었을 때, "저는 예수, 마리아 외에는 아무 것도 모릅니다"라고 대답하면서, 차라리 죽을지언정 배교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어려운 형벌을 받고 형조로 이송되어 감옥에 들어가자, 신자들은 "예수, 마리아 외에는 아무것도 모르는 아가다가 왔군"하며 반가이 맞았다.
그는 아직 영세를 받지 않았으나 3년 간의 극심한 고통으로 가득찬 옥중생활 속에서 교리를 배워 대세를 받고, 1839년 5월 24일 8명의 교우와 함께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로 순교하여 예수, 마리아의 아늑한 품에 영원히 안겼다.

- 박아기(안나)
* 나이 : 56세 / 순교 년 월일 : 1839.05.24
* 순교장소 : 서소문밖 / 형벌 : 참수

성녀 안나 박아기(朴阿기)는 강원도 강촌 출신으로 서울 한강변에 살면서 모친과 함께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다. 기억력이 둔하여 교리문답과 기도문 배우기가 매우 힘들었으나 하느님을 사랑하여 매일 열심히 기도하였다. 그는 "나는 천주를 내가 원하는 대로 알지는 못하지만 적어도 마음껏 사랑하기로 힘쓰겠다"고 말하며 스스로를 위로하였다 한다. 18세 때 교우인 태문행(太文行)과 결혼하여 슬하에 2남 3녀를 두어 그 자녀들을 매우 열심으로 키웠다. 특히 성녀는 그리스도의 수난에 대한 특별한 신심이 있어 구세주의 오상을 생각하고 많은 눈물을 흘렸다.
1839년 2월에 전가족이 함께 체포되었는데, 포청에서의 혹형과 고문으로 남편과 자식들은 배교하고 석방되었으나, 혼자 배교를 거부하고 온갖 어려움을 이겨냈었다. 연일 계속되는 혹형으로 살이 찢어지고 뼈가 튀어 나왔지만 평온한 얼굴로 고통을 참아내면서 함께 갇힌 교우들을 위로하며 때때로 위문 오는 가족들에게는 잊지 않고 권면하였다.
1839년 5월 24일 8명의 교우와 함께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 치명하였다.

자료출처: http://www.jeoldusan.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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