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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롬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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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료3

본문

해미성지

해미는 일찍이 천주교가 전파된 내포 지방의 여러 고을 가운데서 유일하게 진영이 있던 군사 요충지였다. 1418년에 병영이 설치되었고, 1491년에 석성이 완공된 해미 진영(사적 116호)은 1790년대로부터 백 년 동안 천주교 신자들을 무려 3천 명이나 국사범으로 처결한 곳이다.

1790년대에 순교한 박취득(라우렌시오)을 비롯한 순교자들은 1870년대에까지 수십 명이 이름을 남겨놓고 있지만 그외의 수천 명의 이름은 그들의 목숨과 함께 사라져 버렸다. 해미의 땅은 이렇게 알 수 없는 수많은 순교자들이 쓰러져 갔다는 특성을 지니고 있다.

1799년에 이보현과 수많은 신자들이 순교하였고, 1814년에는 김대건 신부의 증조부인 김진후(비오)가 10년 옥고 후 옥사하였으며, 충청도 지방의 대대적 박해 시기였던 1815(을해)년과 1827(정해)년 기간 동안에는 손여옥 등 수많은 신자들이 집단으로 체포되어 순교하였다.

주로 면천, 덕산, 예산 등지에서 살던 천주교 신자들의 마을을 해미 진영 군졸들이 수시로 급습하고 재산을 약탈한 후 신자들을 체포하여 해미 진영 서문 밖 사형장에서 처형하였다. 체포된 신자들 가운데에 신분을 고려하여야 할 사람들(양반층)은 상급 치소인 홍주, 공주, 서울로 이송되었으며, 대부분의 보잘것없는 사람들은 심리 절차(기록) 없이 해미에서 처형되어, 글자 그대로 무명 신자들이 수천 명 순교한 곳이 해미 땅이다. 1866(병인)년 이후 몇 년 간의 대박해 동안에만 순교한 숫자를 1천여 명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1790년대부터 희생된 순교자가 3천여 명으로 추정된다. 이름이 알려진 순교자는 박취득(라우렌시오)등 수십 명 뿐이다. 성지관리 : 해미 성지 관리소 (0455-688-3183)

1. 순교자들이 넘던 한티고개

면천 고을과 예산 및 덕산 고을의 천주교 신자들을 해미 군졸들이 압송하여 넘던 고개이다. 교우들이 무리지어 살던 면천의 황무실 마을과 덕산의 용머리 마을, 배나드리 마을 등지에서는 집단으로 체포되어 넘기도 하였다. 한티고개를 넘어 붙잡혀 가던 숱한 순교자들이 고개 마루터에서 고향 마을을 마지막으로 뒤돌아 보던 곳에는 옛 주막의 터만이 남아 있다.

2. 감옥터와 호야나무

높이 5m, 길이 1,800m의 석성으로 옹벽을 두른 해미 진영 안에는 동헌 동남쪽 1,800평 대지 위에 내옥, 외옥으로 구분되던 감옥이 있었다. 이조 시대의 감옥은 높은 담으로 둘러쌓인 울 안에 있었다. 바닥에 멍석을 깔아 겨울에는 춥고 여름에는 말 할 수 없이 더워 한여름 매 맞은 상처는 곪기 일쑤였다. 고문과 굶주림과 갈증과 질병으로 순교자들의 몸이 스러져 가던 감옥은 헐려 없어지고 그 자리만 남아 있다.

그 감옥터 옆에는 지금도 늙은 호야나무가 서 있다. 신자들을 끌어내어 머리채를 묶어 매달고 몽둥이로 치면서 고문하던 흔적으로 오늘도 이 나무의 묵은 가지는 녹슨 철사줄에 움푹 패이도록 옛 님들의 아픔을 살갗에 두르고 있다.

3. 관아터와 장터길

진영장이 호령하던 옛 동헌은 지금은 헐려 없어지고 그 집터만 철책으로 표시되어 있다. 그 옆자리에 아문(衙門)과 호서좌영(湖西左營)의 옛 모습이 복원되어 있고, 뜨락에 있었을 법한 노송 여섯 그루가 당시 호령 소리, 곤장치는 소리, 비명 소리를 이파리마다 묻혀 놓은 듯 그 터에 서 있다. 관아터로부터 남서쪽으로 헐려진 옛 집터 사이사이에 질퍼덕한 길이 있다. 옛 저자길이다. 옛 님들이 저주의 욕설을 온 몸에 묻혀가며 형장으로 호송되던 길이다.

4. 서문 밖 순교지

저자길을 따라 서쪽 하수로에 다다르면, "재앙을 떨쳐내는 문"(征 門)이 비껴 있다. 재앙의 씨알머리를 서쪽에 내어 버리듯이, 사학 무리를 이 문 밖으로 끌어내어 쳐 죽였다. 잡아들일 때 빼앗았던 십자가와 묵주 등을 이 문의 난간에다 넣어놓고, 지나가며 밟게하여 천주학을 버리고 목숨을 살려보라 하였다. 그러나 그님들은 성물에 머리 숙여 절을 하고, 문턱을 넘어 가서 목숨을 기꺼이 내놓았다. 이 문의 누각에는 지성루(枳城樓)라 쓰여 있는데, 본래 탱자나무(枳)로 둘러쳐진 해미 진영이었기 때문이지만 이 서문이란 그 님들이 가시밭 이 세상을 떠나가던 마지막 문이었다. 이 문을 나가면 그 님들을 밀어넣고 돌로 찧던 하수구가 입을 벌리고 있다. 하수구를 가로 질러 놓여 있던 돌다리는 그야말로 사람 도마였고, 여기저기 시체가 쌓여 썩고 피가 땅에 젖어 남아 흐르는 곳이 서문 밖이었으니 여기서 죽은 목숨을 몇 천이나 되었는지 헤어릴 수 없어 그저 '시산혈하(屍山血河)를 이루던 곳이었다'라는 말만 남아 있다.

5. 피의 제사상 자리개돌

서문 밖 순교지에서 순교자들의 목숨을 빼앗는 방법은 가지가지였다. 돌로 쳐 죽이기도 하고, 돌구멍에 줄을 꿰어 목에 옭아 지렛대로 조여 죽이기도 하고, 묶어서 눕혀 놓은 여러 명을 돌기둥으로 내리 눌러 죽이기도 하였으며, 얼굴에 백지를 덮고 물을 뿌려 질식시켜 죽이기도 하고, 나무에 매어 달고 몽둥이로 죽이기도 하였다.

특히 잔인하게는 돌다리 위에 연약한 순교자를 서너 명의 군졸들이 들어올려 자리개질(태질)하여 머리와 가슴을 으스러지게 하기도 하였다. 1866년 병인박해시 양촌 사람 방영창 안토니오 등 수많은 분들이 순교하였다. 꿈틀거리는 몸둥이가 있으면 횃불로 지져 숨을 끊어버렸다. 이 자리개돌은 서문 밖 순교 성지 일부를 확보하여 보존하고 있다.

6. 벌판길과 진둠벙

1790년대부터 80여 년간 시산혈하를 이루던 서문(정분문)밖 사형터는 병인 대박해시(1866년 이후)에는 주거 인접 지역인 관계로 대량의 사학 죄인의 시체를 처리하기에는 협소한 장소였다. 1천여 명을 단기간 동안에 처형하기 위해 벌판에서 집행하게 되었는데 죽이는 일과 시체 처리하는 일을 한꺼번에 해치우기 위해서 십수명씩 생매장하게 되었다. 생매장시키러 가는 길에 큰 개울을 만나게 된다. 개울을 건너는 곳에 외나무 다리가 있었고, 그 밑에는 물길에 패인 둠벙이 있었다. 두 팔을 뒤로 묶이어 끌려오는 사학 죄인들을 외나무 다리 위에서 둠벙에 밀어 넣어 버리기도 하였다. 묶인 몸으로 곤두박질 당한 죄인은 둠벙 속에 쳐박혀 죽었다. 이 둠벙에 죄인들이 떨어져 죽었다하여 동리 사람들 입에 "죄인둠벙"이라 일컬어지다가 오늘날에는 말이 줄어서 "진둠벙"이라 불리어진다.

7. 생매장 순교지 여숫골

동구 밖 서쪽의 나무가 우거진 곳이었기에 "숲정이"라 불리던 곳이다. 오늘엔 논으로 가꾸어진 벌판이지만 병인년대에는 숱한 천주학 죄인들이 산 채로 묻혀졌던 곳이다. 옛날엔 농부의 연장 끝에 걸려들던 뼈들이 많았었다 한다. 이 뼈들은 수직으로 서 있는 채 발견되었다 하는데 그것은 죽은 몸이 아닌 살아있는 사람이 묻혔다는 증거이다. 산 사람들이 묻히던 어느날엔 함께 묻힐 동아리 가운데에 어여쁜 규수도 있었다 한다. 묻기를 명할 찰나에 형장의 눈에 들어온 규수의 자색은 그 형장의 연민을 자아내었다. 어여쁜 얼굴에 어찌 사학을 하여 죽는 몸이 되었느냐고. 살려줄 터이니 사학을 버리라고 꾀었으나 입술을 깨물고 그 규수가 먼저 구덩이에 뛰어 내리니 동아리 가운데 한 사람도 빠짐없이 함께 묻히더라는 이야기가 구전으로 전해 온다. 그날 묻히던 그 찰나에 하늘이 천둥으로 함성하고 사흘을 안개로서 생무덤을 덮어 주더라고 전해 온다. 묻히던 순교자들이 한결 같이 하늘에 외쳐대는 소리가 있었으니, "예수, 마리아!"라는 간구였다. 허나 구경꾼들이 듣고 전하여 준 오늘까지의 동리 사람들 말로는 "여수 머리"라 하여 여우 홀린 머리채로 죽어 갔다고 해서 이 숲정이를 "여숫골"이라 부르고 있다.

8. 무명순교자 묘

병인박해시 해미 생매장 순교 현장을 목격했던 이주필, 임인필, 박승익 등의 증언에 따라 1935년 서산 성당 범 베드로 신부가 생매장지 일부를 발굴하여 순교자들의 유해 및 묵주, 십자가를 수습하여 서산군 음암면 상흥리 공소 뒷산에 안장하였었다. 1995년 순교자 대축일에 이를 다시 해미 성지로 이장하여 본래의 순교터(현 순교자 기념탑 앞)에 모셨다. 상흥리 순교자 묘소 자리에는 십자고상과 진토가 된 순교자 유해 일부를 모셔두고 있다.

자료출처 : http://www.haemi.or.kr/index2.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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