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교자료3 5 페이지 | 예수사랑
  •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롬8:13)

    bg

순교자료3

본문

절두산 순교성지

1. 조선시대 양화진.잠두봉

절두산은 조선조 지리서인 『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가을두(加乙頭), 잠두봉(蠶頭峰 지세가 누에의 머리와 비슷함에서 연유)이라고 불렀다.『실록』에도 세종 때 이곳이 가을두라 불렀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말은 원래 우리말의 들머리 즉 머리를 높이 든 형상을 가리키는 말이다. 잠두봉은 양화진의 동쪽 언덕에 있었는데 도 이 양화진 나루터에는 한강을 통해서 각 지방에서 조세곡 수송선과 어물,채소 등을 실은 배가 드나들었다.
교통이 발달하지 못한 상태에서 배는 최고의 교통수단이었고, 또한 양화진 주변은 잠두봉과 어울려 이름난 승경으로 많은 풍류객과 문인들이 뱃놀이를 즐기면서 시를 지었던 풍광이 수려한 곳이었다.

2. 1866년 병인박해와 절두산

1866년 병인박해로 로즈 제독이 프랑스 함대를 이끌고 1866년 9월과 10월 두 차례에 걸쳐 침입을 하였는데, 당시 조선은 신앙의 자유는 없었지만 프랑스에서 입국한 선교사들에 의해 천주교가 전해지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집권자들은 교통과 군사의 주요한 땅인 양화진이 서양의 세력에 의해 더렵혀진 것이 천주교인들 때문이니 천주교인들의 피로써 오욕을 씻고자 이곳을 천주교인들의 사형 집행지로 택하였다. 1866년 10월 22일 황해도 사람으로 시흥 봉천동에서 잡혀온 이의송(프란치스코)과 그의 아내 김엇분(마리아), 아들 붕익(바오로)이 최초의 순교자가 되었다.

3. 1956년 양화진 순교지 매입

병인박해의 순교지인 “절두산 치명터를 확보하자”는 호소문을 발표하면서 각계각층의 협조와 관심을 구하던 한국 천주교 순교자 현양회가 1956년 11월에 마침내 양화진 순교지를 매입하게 되었다.

자료출처 : http://www.jeoldusan.or.kr/

상단으로 가운데로 하단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