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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료4

본문

현풍지역에 왔던 순교자의 발자취

1. 신유박해 때 귀양온 조운형 교우

1801년 신유박해 때 경기도 여주에서 조운형(趙 運亨)이란 교우 관리가 현풍으로 귀양왔다고 사학징의(邪學懲義)에 기록되어 있다. 죄명은 장익사서죄(藏匿邪書罪) 즉 천주교 교리서를 숨겨 보관한 죄였다. 조운형 교우가 현풍에서 귀양살이하며 현풍지역에 복음의 씨를 뿌렸는지는 지금으로선 알 수 없다. 그러나 현풍 땅을 밟은 최초의 천주교 신자가 조운형인 것으로 추측된다.

2. 순교자 가선 대부(嘉善 大夫) 남상교(아우구스띠노)
103위 성인 중의 한 분인 승지 남종상 요한세자의 종숙부인 남상교(1744-1866)는 슬하에 딸 하나만 두고 아들이 없어 남종삼 성인을 양자로 삼았다.

남상교 아우구스띠노 순교자는 1866년 공주 감영에서 순교하였는데 1837년경부터 1840년까지 현풍 현감으로 재직하였으며 이때 남 현감의 일가족이 현풍에 3년 동안 살았다. 남종삼 성인도 당시 현풍에 거주하였는지는 알려진 바가 없으나 현풍을 떠날 때 남 현감이 58세 남종삼 성인이 25세였던 것으로 미루어 수차례 현풍을 다녀갔을 것으로 추측된다.

남상교 순교자는 일찍이 충주에서 의원을 지내고 이유일(李 唯一) 안당에게서 교리를 배우고 1827년 북경에서 영세를 받고 온가족이 입교하였다고 알려져 있다. 남상교 순교자가 현풍 현감 재직 때 선정을 베풀어 현풍에 유일하게 청덕비가 세워졌다. 일반적으로 현감이 이직시에는 송덕비를 세우는데 남 현감은 흉년이 들고 백성이 어려울 때 백성들을 도왔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 비석은 현풍 면사무소에 있었는데 1874년 5월 27일 절두산 성지로 옮겨졌다.

남 현감이 현풍에 올 때 친구 안씨를 데리고 왔는데 그 25대 후손이 아직 현풍에 살고 있다.

남상교 순교자는 이후 영해부사(寧海府使) 충주목사(忠州牧使) 동돈령부사(同敦寧府使)의 벼슬을 한 가선 대부(嘉善大夫)였으며 농산학자(農産學者)로서도 이름이 높았다. 이후 여러 가지 중직이 신앙생활에 방해가 된다고 판단하여 모든 공직에서 사임하고 신앙생활을 자유롭게 하기 위해 배론에서 10리 떨어진 충청도 제천에 있는 묘재로 이사하여 신앙생활을 하며 살았다.

아들 남종삼 성인은 1860년 영해 부사의 벼슬을 하다 관직이 신앙생활에 장애가 많아 관직을 사임하고 지내다 집안의 생계를 꾸려가야 하는 책임 때문에 1863년 서울로 올라와 승지가 되었는데 1866년 러시아 배 한 척이 함경도 국경을 넘나들어 조정에서 문제가 되었다.

이 때문에 조정에서는 어려움에 처하였는데 이때 남종삼 승지는 이이제이 방아책(以夷除夷 防我策)이라는 청원서를 냈다. 이는 선교사들의 도움을 받아 프랑스, 영국 등과 수교하여 그 도움으로 러시아를 물리친다는 것이었다. 이 청원서는 대원군에게 좋은 반응을 얻어 서양의 선교사를 찾을 것을 하명받고 남종삼 승지는 베르뇌 주교를 찾던 중 러시아 군함은 물러가고 나자 선비들이 천주교를 박해할 것을 탄원하였으며 남종삼 성인은 대원군을 면담하고 베르뇌 주교와 교섭할 것을 요청하였으나 대원군의 냉대를 받았다. 남종삼 성인은 부친 남상교 아우구스띠노가 머무는 충북 제천 묘재를 찾아가 이 일을 논의하였다.

남상교 순교자는 "너는 충성스러운 신민의 일을 했다. 하지만 그로 인해서 너는 목숨을 잃을 것이다. 네 사향 선고에 서명하라고 하면 거기에서 천주교에 욕된 표현은 일체 지우도록 명심하여라."는 당부를 하였다.

남종삼 성인은 서울로 올라가기에 앞서 10리 이상 떨어진 배론신학교를 찾아가서 성사를 보고 순교 준비를 하였다. 남종삼 성인은 경기도 양주에서 체포되어 홍봉주 토마스와 함께 1866는 음력 정월 21일 순교하였다.

성인이 순교한 후 아버지 남상교 아우구스띠노도 체포되어 공주감영에 수감되었으며 그해 2월 3일 관직(官職)을 사적(仕籍)에서 삭간(削刊)당하고 옥중에서 거듭 배교의 유혹을 받았으나 단호히 이를 물리치고 그해 음력 3월 3일 옥중에서 순교하시니 83세의 고령이었다.

당시 조정의 남상교 순교자에 대한 죄명은 '공(公)의 부군(府君) 상교(尙敎)는 재식(才識)이 놀라우나 사교(邪敎)에 혹(惑)하여 천주(天主)를 신명(神命)과 같이 받을어 오기 수십 년으로 아버지는 아들을 가르쳤고 아들은 아버지를 이어 사교(邪敎) 봉행(奉行)을 가훈(家訓)으로 삼았으며 외국 선교사를 향리(鄕里) 가까이 숨어살게 하고 또한 외국인과 수교(修交)의 모의(謀議)를 사주(使嗾)한 자이니 비록 응좌지율(應坐之律)을 면(免)할 수 있을만치 연로(年老)하나 그 뿌리를 제거키 위해 추국(推鞫)하여 정형(正刑)으로 다스려야 한다'고 연소(聯疎)하였다.

남종삼 성인의 아들 명희(明熙)는 14세의 어린 나이에 전라감영에 수감되어 1년 이상 전라감사로부터 배교의 강요에 시달렸으나 끝내 신앙을 고수하고 다음해 전주성 밖 숲정이에서 순교하였다. 아내 이소사도 창녕현에 관노비로 유배되어 9년 간 온갖 고초를 겪고 순교하여 남종삼 아우구스띠노 순교자 집안에서 3대에 걸쳐 4명이 순교의 영광을 입고 천상영복을 누리게 되었다.

1875년 남은 3자녀가 노비지점에서 풀려났으며 1894년 갑오경장으로 남종삼 순교자의 가문은 신원 설치(伸寃雪恥) 복권되었다.

자료출처: http://myhome.naver.com/hpcatholic1/menu01/hpsungyo.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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